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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스위스여행 취리히 연방공과대학 ETH zurich,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

by Amy3773 2023.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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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여행하면 떠오르는 곳 중 한 곳인 취리히(Zurich) 그곳엔 어떤 매력이 있을까요? 많은 도시들을 다녀왔지만 제 마음속 1등 도시는 단연 취리히였어요. 그래서 여러분께 취리히 소개 겸 역사 속 인물 두 분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취리히는 어떤 도시인가요?

 

취리히는 스위스의 대표적인 관광도시이자 금융중심지입니다. 독일어권 지역이지만 프랑스어 역시 많이 사용되는 중립국이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들이 공존하며 아름다운 자연경관 또한 가지고 있는 아주 매력적인 도시랍니다.



역사 속 인물중 누구를 소개해주실 건가요?


바로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입니다. 이 둘은 모두 노벨상 수상자이며 물리학계에선 엄청난 업적을 남긴 대단한 사람들이죠. 하지만 동시에 나치즘이라는 어두운 그림자 아래 있던 시대를 살았던 비운의 천재이기도 합니다. 과연 이 둘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이후 나치는 유대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어요. 이때 미국 프린스턴 대학 교수였던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기부해서 만든 재단을 통해 유대인들을 지원했습니다. 그러자 나치는 아인슈타인을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위험인물로 규정했고 결국 아인슈타인은 1933년 4월 18일 베를린에서의 강연을 마지막으로 스위스로 망명하게 됩니다. 

당시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라고 불렸던 아인슈타인이었기에 수많은 나라에서 아인슈타인을 데려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인슈타인은 끝까지 조국이었던 독일을 버리지 않고 스스로 망명길에 올랐어요.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과학자로서 전쟁을 막기 위해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지만 1945년 7월 16일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실험을 보고 나서 인류 문명 발전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핵무기 반대 운동가로 활동하게 됩니다.


한편 같은 시기 영국 옥스퍼드 대학 교수였던 오펜하이머는 핵개발 연구소 소장직을 맡게 됩니다. 그러던 중 원폭실험을 직접 눈으로 본 후 충격을 받고 '맨해튼 계획' 즉 우라늄 폭탄 제조계획 책임자 자리에서 사임하면서 본격적으로 반핵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맨해튼 계획 덕분에 우리는 지금 이렇게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되었죠. 만약 그때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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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은 모두 노벨상을 수상한 천재 물리학자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분야에서 연구했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유대인이라는 점과 미국 출신이라는 점이죠. 하지만 이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2차 세계대전 중이었고, 나치 독일과의 관계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특히나 아인슈타인은 전쟁 후 자신의 조국이었던 독일로부터 추방당하기도 했죠. 이러한 배경 속에서 과학자로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왜 나치의 박해를 받았나요?
아인슈타인은 1905년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당시 학계에서는 뉴턴 역학만이 진리라고 믿었는데,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가정하에 시간과 공간 등 모든 개념을 새롭게 정의했습니다. 또한 질량과 에너지가 동등하며, 물질 사이의 상호작용 없이도 힘이 전달될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했죠. 이렇게 기존의 틀을 깨는 새로운 이론을 내놓은 아인슈타인은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히틀러 정권 하에서 반유대주의 사상이 팽배해지면서 많은 유대인 학자들이 탄압을 받았습니다. 아인슈타인 역시 마찬가지였죠. 심지어 아인슈타인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던 한 교수는 “당신 같은 유태인은 우리 학교에 다닐 자격이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연방공과대학(ETH)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고 스위스로 이주하게 됩니다.

노벨상 상금은 어떻게 쓰였나요?
아인슈타인은 노벨상 시상식장에서도 ‘반유대주의’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왜냐하면 스웨덴 정부가 수여한 노벨상 상금 1천만 크로네(약 16억 원) 전액을 기부했기 때문이었죠. 원래대로라면 나머지 절반은 아인슈타인 부부가 나눠 가져야 했지만, 아인슈타인은 이를 거부했고 아내 밀레바 마리치 여사도 남편 뜻에 동의했습니다. 이후 아인슈타인 부부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앞장섰습니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 런던 공습으로 폐허가 된 도시 재건을 위해 100만 달러를 기부했으며, 베를린 장벽 붕괴 때도 동독 주민들을 위해 10만 달러를 쾌척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해서도 노력했는데요, 훗날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이 된 시몬 페레스 여사는 생전에 “아인슈타인이야말로 진정한 평화주의자였다”라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물리학계의 거장이자 시대의 지성인으로서 존경받는 인물이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역사의 피해자이기도 했던 아인슈타인. 지금까지도 수많은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위대한 과학자임엔 틀림없습니다.